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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가 그치면(제38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작)
이영철
소설집
4*6판(양장) / 336쪽
2014년 06월 20일 발행
979-11-85482-25-5
13,000원

한국 소설의 낯선 미학적 패러다임!
강렬하고 불온한 문체, 익숙한 일상에 대한 반란
치사량의 비탄, 그 끝을 넘어선 낯선 삶의 사랑법

글을, 소설을 쓴다는 것은
<고독한 축제의 가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행복을 늘 멀리서 찾는다. 하지만 멀리서 찾다보면 늘 뒷모습만 보여줄지도 모른다, 바로 내 뒤에 있는 행복이란 놈에게.
행복하기 위해 소설을 쓴다. 하지만 소설을 쓰는 순간은 가장 행복한 시간임과 동시에 가장 고통스럽다. 행복하기만 하다면 좋으련만…… 빌어먹을 놈의 이 아이러니라니.

촛불 한 자루 밝히고 독한 커피와 줄담배로 지새웠던 그 숱한 불면의 밤들. 그리하여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아홉 편의 작품들. 이제 그놈들을 내 품에서 떠나보낸다. 시원섭섭하다는 표현이 이리도 적절할까.

떠난다는 것은 돌아온다는 무언(無言)의 약속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 약속이 유효한지 모르겠다. 살아있는, 살아있다는 것이 미안하고 고마운 이 순간, 나는 또 여행가방을 꾸리고 있다.

쓸쓸하다거나 고독하다는 것은 지나온 날들이 그런대로 아름답고, 행복했기 때문이리라. 그래, 앞으로도 나는 행복할 것이다. 왜냐하면, 앞으로도 고독한 축제를 즐길 것이므로.

새가 나는 것은 즐거워서가 아니라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나의 문학은 어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새처럼!

1981년 데뷔 후 시, 소설, 에세이, 시나리오 등 다양한 방면에서 꾸준한 작품 활동을 펼쳐 화제를 불러온 작가 이영철의 단편소설집 『이 비가 그치면』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표제작 「이 비가 그치면」을 비롯하여 「성불」, 「아버지의 반지」, 「겨울비, 담배, 섹스 그리고」, 「첫 여자」, 「자살 여행」, 「겨울 벚꽃」, 「꽃지에 버린 사랑」, 「애가불망」 등 9편의 단편소설을 통해 삶의 의미와 지고지순한 사랑을 애절하게 담아내고 있다.

“……마당에 큰 항아리가 있는데 깨치지 않도록 조심해서 부처 도둑이 되고자 하는 니놈이 채우고 싶은 걸로 가득 채우고 내려가거라.”
「성불(成佛)」은 ‘왜 사는가?’라는 인생의 벽에 부딪친 주인공이 큰스님과 만남을 통해 인생의 참뜻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 특히 삶의 굴레, 속박, 그리고 덧없음이 평범한 항아리를 통해 표출되는 순간, 독자들은 주인공과 함께 커다란 깨달음을 얻게 된다.

「아버지의 반지」는 주인공이 어린 시절 부모님께 사 드린 싸구려 플라스틱 반지를 통해 자식을 향한 부모의 애잔하면서도 끝없는 사랑을 담고 있다. 주인공에게는 잊혀진 기억에 불과했지만 부모에게는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은 과거의 어느 순간.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가 잊고 살아온 부모님의 사랑을 되돌아보게 한다.     

「겨울비, 담배, 섹스 그리고」은 블랙커피처럼 은은한 향과 씁쓸한 맛이 조화된 사랑 이야기이다. 인생의 깊이가 느껴지는 중년의 농익은 사랑을 통해 서로의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 받는다.

금지된 사랑을 통해 아련한 추억을 되살리는 「첫 여자」는, 주인공이 성장하면서 느끼는 호기심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성숙한 후 사랑의 추억으로 남는 이야기이다. 아슬아슬한 필체로 그려낸 주인공과 누나의 모습에서 금단의 열매를 따먹는 아담과 이브의 모습이 비춰진다.   

「이 비가 그치면」은 애틋한 첫사랑을 간직한 한 남자의 시선에 시작한다. 그는 시 품평회에서 만난 한 여자를 보며 힘들게 잊었던 첫사랑의 기억을 불현듯 떠올린다. 되새기는 그의 쓰라린 상처를 그녀는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치유한다.

「자살 여행」은 서로 사랑하지만 이룰 수 없었던 한 연인이, 서로의 행복을 위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헤어짐을 택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지막에 병원에서 진심을 확인하는 슬픈 연인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사랑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겨울 벚꽃」은 한 영화감독의 안개 같은 인생을 통해 삶의 애환과 고뇌, 갈등을 담아내고 있다. 주인공은 실패한 사업과 결혼생활, 그리고 인생의 좌절 속에서 결국 죽은 듯 보이나 봄에 활짝  필 ‘겨울 벚꽃’처럼 새 희망을 품게 된다. 

‘남자는 마지막 여자를 못 잊어하고, 여자는 첫 남자를 못 잊어한다.’ 「꽃지에 버린 사랑」은 한때 육체적인 사랑을 불태우던 연인이 결국 정신적인 사랑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헤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로를 탐닉하던 남녀, 그들의 사랑은 결국 텅 빈 바다가 보이는 ‘꽃지’에서 종지부를 찍게 된다.   

「애가불망」은 어느 연인의 사랑을 향기까지 담아내는 세밀한 묘사로 그려낸 작품이다. 애틋한 사랑, 갑작스런 이별, 그녀의 체취가 남아있는 방, 그리고 재회……. 작가는 누구나 한번쯤 느껴보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담아내었다. 


*본문 중에서

도대체 오줌이 어쨌다는 것인가.
오줌줄기가 위를 향하든 아래를 향하든, 위를 향해서 상향적 이미지를 주든 아래를 향해서 하향적 이미지를 주든 그 지엽적인 것이 이 시 전체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시에 있어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것쯤은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시를 마치 배를 가른 실험실의 개구리처럼 낱낱이 해부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개구리의 내장 하나하나가 개구리의 본질은 아니잖은가 말이다.
그날 품평회에 한 동인이 상재한 「그 여름의 금강」이란 시에서 ‘유년의 그 여름/ 천둥벌거숭이 꼬맹이들은/ 금강에 누워/ 송장헤엄을 치며/ 식빵을 닮은/ 미치도록 배가 고프게 만드는/ 뭉게구름을 향해/ 일제히 분수 같은 오줌줄기를 내깔겼다’라는 표현을 가지고 한 시간째 목에 굵은 철사 줄 같은 핏대를 세워가며 편이 갈려 있었다. 지겨웠다, 늘 이런 식의 생산성 없는 논쟁이.
송장헤엄은 배영(背泳)처럼 누워서 헤엄치는 것인데, 어찌해서 오줌줄기를 내깔겼다라고 쓸 수가 있냐는 것이다. ‘내깔겼다’는 이미지는 아래를 향할 때 쓰는 표현, 즉 하향적 이미지이기 때문에 틀린 표현이라는 측과, 시의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 그럼 굳이 상향적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내뿜었다’라고 써야 하느냐, 이미지적으로는 맞지 않더라도 이 시에서는 내깔겼다라고 쓰는 것이 훨씬 시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어 좋다, 라고 주장하는 측의 팽팽한 논쟁이었다. 예전에도 품평회가 열릴 때마다 이런 식의 논쟁은 있어온 일이지만 일 년 가까이 나오지 않다가 모처럼 참석한 자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짜증이 나고 불편했다.

말없이 술잔만 기울이던 민우는 슬그머니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온 후, ‘이모네 집’ 처마 밑에 서서 담배를 물고, 네온사인이 명멸하는 도심을 적시는 비를 보고 있었다. 민우가 뿜어내는 담배연기는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아주 느리게 사라져갔다. 인사동 수도약국 옆 골목 안쪽 깊숙이에 자리 잡은 이모네 집은 십 년 가까이 매달 시 품평회를 할 때마다 모이는, 파전과 막걸리와 칼국수로 유명한 기와집 한옥을 개조한 식당이었다. 담배를 한 개비 더 피우고 들어갔는데, 동인들은 그때까지 험악한 분위기까지 연출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논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도대체 오줌을 내깔기건 내뿜건 그것이 어쨌다는 것인가. 정말 그것이 이토록 편이 갈려 핏대를 세우다 못해 삿대질까지 해대며, 위악적이며 인신공격적인 독설까지 서슴지 않으며 싸울 만큼 그렇게 중요한 것이란 말인가. 그것도 어느덧 함께한 지 십 년을 넘어 열권이라는 동인지를 함께 발간한 사람들이. 아니, 어쩜 이들은 비 오는 날 품평회라는 미명하에 한자리에 모여 각자 외롭고 허허로웠던 가슴을 달래며, 술을 마시며, 이미지 하나를 가지고 치열하게 논쟁하는 그 행위 자체를 즐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상업적 경제논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무위적이며 비생산적인 행위이지만 예술을 하고 있다는, 시를 쓴다는 지적 우월감으로. 이 속절없는 전투가 끝나면 그들은 취해서 언제 싸웠느냐는 듯이 서로의 어깨를 얼싸안은 굴비 두루미들이 되어 비 오는 거리를 휘저으며 밤늦도록 술판을 벌일 것이 뻔했다.

민우는 더 이상 앉아 있고 싶지 않아 동인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밖으로 나왔다. 비는 어느새 폭우로 변해 있었다. 겨울여행에서 보았던 러시아의 낮게 내려앉은 짙은 잿빛 눈구름처럼 음울한 하늘에 나무의 뿌리 같은 번개의 섬광이 연달아 폭죽처럼 수놓였다. 망설이다 폭우 속으로 몇 발자국 내딛었을 때였다.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검정우산 하나가 민우의 머리를 가려주었다.
“줄곧 지켜보다 나가기에 따라 나왔어요.”
그녀는 오늘 처음 본 시인이었는데, 시 품평회 때마다 동인 중에서 누군가 초청한 시인이 참석할 때가 종종 있었다. 민우는 이모네 집에서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었다. 칠 년 전에 그토록 가슴앓이를 하게 했던 순영이와 어딘지 모르게 닮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서늘한 눈매가. 이제는 잊었노라고 애써 피 흘리는 상처를 덮고 있었다. 하지만 술에 취해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순영이 그리웠다. 민우가 순영을 잊었다고, 잊겠노라고 수도 없이 굳은 다짐을 했건만, 하늘이 파랗다고 해서, 해가 떴다고 해서, 구름이 끼어 있다 해서, 그 하늘에 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민우는 이모네 집에서 그녀가 자신을 소개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 일부러 자리를 피했었다. 민우는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길을 애써 피하며 물었다.
“왜요? 더 있지 않으시고.”
“체질에 안 맞아서요. 잘난 척들 하는 꼴도 보기 싫고…….”
그렇게 말한 그녀는 서양식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우산을 들지 않은 왼쪽 손바닥을 내보이며 쿡 웃었다. 그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이 귀여워 민우도 따라 웃었다. 가까이서 보니 순영이와 전체적으로 많이 닮기는 했지만 키도 약간 작고, 입술과 입매 부분이 다르고, 결정적으로 보조개가 없었다.

*
순영은 칠 년 전 늦가을 졸업을 얼마 앞두고 민우에게서 떠났다. 순영과 민우는 학교 내에서도 소문난 커플이었다. 민우는 순영을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픈 가족사를 듣고 자신의 처지와 닮은 순영에게 더 잘해주려고 신경을 썼다. 순영의 가족사는 민우와 비슷했다. 민우 역시도 어렸을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새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다행히도 새어머니는 민우에게 잘했고, 남매인 이복동생들과도 사이가 좋았다.
순영이 아버지는 일 때문에 마산에 가서 동료들과 술 한잔 하러 갔다가 술집 여자와 눈이 맞아 살림을 차리고 딸까지 낳았는데, 그 아이가 순영이라고 했다. 순영이 어머니는 가정적이라기보다는 허영기와 욕심이 많았는데 그것을 채워주지 못하는 무능한 아버지와는 여러 가지로 맞지 않아 순영이 일곱 살이 되던 해 여름에 헤어졌고,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나이가 스무 살이나 많지만 빌딩 몇 개를 가진 홀아비를 만나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천호동 시장 부근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순영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엄마의 손길이 가장 필요한 때에 아버지가 건축현장에서 일을 마치고 밤이 돼 돌아올 때까지 빈집에서 혼자 지내야 했다. 건축일이라는 것이 한 곳에 고정된 것이 아니기에 어느 때는 지방에 내려가 일주일 이상 집을 비울 때도 있었다. 다른 애들은 하교 후에 학원을 가거나 집에서 부모들과 함께 있었지만, 순영은 동네 놀이터에서 그네나 시소를 타며 혼자 놀거나 아직은 어려서 학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외로움을 달랬다. 그렇게 날이 저물면 집에 돌아와 간단한 밑반찬에 전기밥솥에 해놓은 밥을 먹고, 밤이면 무서워서 문을 꼭꼭 잠그고, 엄마가 보고 싶어 엄마가 미처 챙겨가지 못한 로션 뚜껑을 열고 화장품 냄새를 맡으며 울다가 잠이 들곤 했는데, 로션은 아빠가 알면 혼날까 봐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두고 있었다. 순영의 유일한 친구이자 위안은 엄마가 아버지와 헤어지던 해 어린이날에 사준 순영이 키만큼 커다란 백곰 인형이었다. 잠잘 때는 언제나 백곰 인형을 안고 잤는데, 무서운 꿈이라도 꾸고 난 아침이면 인형의 얼굴은 순영이 흘린 눈물자국으로 얼룩져 있곤 했다.
순영을 버리고 떠난 엄마는 그 뒤로 찾아오기는커녕 단 한 번 전화조차도 없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원망과 반항심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순영이 자폐증상까지 보이며 문제아로 변해 말썽만 부리던 초등학교 3학년 봄에 아버지는 지금의 새어머니를 집으로 데려왔다. 건축현장에서 같이 일을 하다가 만났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모든 것에 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순영은 사사건건 그녀와 부딪쳤고, 아버지의 불호령과 회초리를 맞으면서도 끝내 단 한 번도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정말 어쩔 수 없이 불러야할 상황이 오면 마지못해 ‘아줌마’라고 불렀다.
그렇게 그녀와 불편하고 어색한 동거를 시작한 지 사 년 만인 중학교 1학년 때, 평소 술을 좋아하고 비만이 심해 당뇨를 앓고 혈압이 높던 아버지마저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화장실에서 쓰러져 손쓸 겨를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는 장의차에서 그녀는 하얀 소복을 입고 차창 밖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고, 순영은 입안에 비릿한 피 비린내가 나도록 윗니로 입술을 꽉 물고는 장례식 내내 끝내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순영은 그날부터 아버지마저 없는 썰렁한 집 안에 그녀와 단둘이 남겨졌다. 단 한 번도 어머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그녀와 함께 산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순영은 아버지가 없는 집과 그녀가 싫어 학교 일진들과 어울려 중학교 3년 내내 가출과 술과 담배와 싸움을 일삼으며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나마 보호자로 등록되어 있는 그녀는 보호자 신분으로 학교와 경찰서에 수시로 호출 당했다. 크고 작은 사고를 칠 때마다 피해자 부모를 만나 합의해야 했고, 교장이나 담임에게 무릎 꿇고서 눈물로 선처를 부탁해야 했다. 그녀의 그런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순영은 중학교도 졸업 못하고 진즉에 소년원에 갔거나 퇴학당했을 것이 뻔했다.
순영은 그녀 덕분에 경찰서에서 나오고, 퇴학당할 것을 화장실 청소나 정학 정도로 끝나면서도 끊임없이 사고를 일으켜 그녀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런 순영을 원망하거나 나무라지 않고 일정한 거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만 지킬 뿐이었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기에 곧 자신을 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무슨 까닭인지 떠나지 않았다. 순영으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점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새벽에 나가 밤늦게야 돌아오는 그녀의 일상은 고단해 보였다. 늘 피곤에 찌든 모습으로 돌아와 식탁에서 간단하게 밥 한술 뜨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잠이 들면 어느 때는 문밖까지 들릴 정도로 끙끙 앓곤 했다. 순영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방문 밖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그녀의 앓는 소리를 들으며 가슴 저 밑바닥 깊은 곳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먹먹함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아침에 보면 그녀는 이미 보이지 않고 언제 일어나 준비했는지 식탁 위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한집에 살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녀와 순영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었다. 그냥 헤어지면 끝이었다. 그녀가 집을 나간다 한들 잡을 사람도, 아쉬워할 사람도 없었다. 그녀와 순영은 늘 일정한 간격을 유지했고, 꼭 필요한 최소한의 의사전달은 냉장고 위쪽 냉동 칸에 메모해서 붙이는 포스트잇이 대신할 뿐이었다. 그것도 순영의 일방적인 의사전달이었고, 그녀는 순영에게 단 한 번도 뭔가를 요구하거나 부탁하는 메모를 붙이지 않았다.
순영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그녀에게 아쉬운 메모를 남기지 않기 위해 방과 후에 여고생이 할 수 있는 모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학비 등 큰돈은 어쩔 수 없이 그녀로부터 도움을 받았지만 용돈 정도는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에게 아무 도움도 받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은 여고생인 자신의 능력으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방과 후에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시간차를 두고 밤늦게까지 하면서부터는 시간이 없어 중학교 3년 내내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과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학교생활도 안정을 찾아갔다. 따라서 그녀가 경찰서나 학교로부터 호출을 당하는 일도 점차 사라졌다. 그러던 여고 2학년 여름방학을 며칠 앞둔 오후 수업시간에 담임으로부터 그녀가 사고로 응급실에 누워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순영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시멘트와 모래와 땀이 뒤범벅이 된 낡고 지저분한 작업복을 입은 채, 얼굴에 온통 붕대를 감고 링거를 꽂은 채 누워 있었는데, 하얀 붕대는 배어나온 피로 해당화 꽃잎처럼 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의사는 그녀의 오른쪽 턱뼈가 부러지고, 오른팔도 두 군데나 골절돼 깁스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급하게 응급조치를 하느라 아직 환자복으로 채 갈아입지도 못한 상태였는데, 헤진 작업복 상의 어깨와 바지 엉덩이 부분은 얼마나 땀이 흐르고 마르기를 반복했는지 허연 소금버캐가 돋아나 쥐 오줌처럼 얼룩져 있었고, 쉰 옥수수 같은 고약한 땀 냄새가 병실 안에 진동했다. 그녀는 그 와중에도 멀뚱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순영을 보고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왼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몇 번 두드리고는 손을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괜찮으니 걱정 말라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큰일 날 뻔했다. 벽돌을 짊어지고 삼 층으로 올라가다 이 층 계단에서 떨어지셨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턱뼈와 오른팔만 골절되고 큰 이상 증세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구나.”
넉넉한 풍채에 사람 좋아 보이는 푸근한 인상의 작업반장은 걱정스럽고 미안한 표정으로 그녀와 순영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반장 역시 현장에서 바로 병원으로 왔는지 흙먼지를 뒤집어쓴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4층 연립주택 공사장에서 들통에 벽돌을 짊어지고 건물 외벽에 임시로 만든 계단을 올라가다가 중심을 잃고 떨어졌다고 했다. 다행히 바닥에 현장에서 사용할 모래가 쌓여 있어 짊어진 벽돌들통이 먼저 닿아 일차 충격을 반감하고, 오른팔과 머리는 그 다음에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쳐 생명을 잃을 뻔한 큰 사고는 막았다고 했다.
순영은 뻘겋게 물든 붕대와 냄새나는 작업복을 입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불쑥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에게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녀는 지금껏 그렇게 힘든 노동으로 번 돈으로 집안 생활을 꾸려가고, 순영의 학비 등을 댔을 것이다. 순영은 그런 자신의 감정을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게 눈을 들어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목이 멘 채 장승처럼 서 있는 순영에게 그녀가 턱뼈가 부러져 발음도 잘 되지 않는 목소리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그녀가 순영에게 건넨 말이었다.
“난 괜찮으니까 어여 학교 가서 공부해, 어여. 학생이 수업을 빼먹으면 안 되는 거여.”
순영은 자신의 몸이 그렇게 망가져 아프면서도 괜찮다고, 학생이 수업을 빼먹으면 안 된다며 병실에서 내쫓는 그녀를 뒤로하고 학교로 돌아가면서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새삼스레 자신에게 있어 과연 그녀의 존재란 무엇이었을까, 아니 그녀에게 있어 자신의 존재는 어떤 의미였을까를 생각했다. 자신이 그녀의 입장이었다면 과연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맹랑하기 짝이 없는 계집애에게 그런 대접을 받으며, 그것도 재혼한 남편도 죽고 없는 시점에서 의붓딸에게 맹목적으로 헌신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그녀의 입장이었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고, 그럴 자신도 없었다.
순영은 그녀의 사고 전까지는 그녀가 휴일조차 없이 거의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몰랐다. 아니, 관심조차도 없었다. 그저 한집에 같이 살 뿐, 마주앉아 밥 한 끼 같이 먹어본 적이 없는 남이나 다름없었다. 순영이 수업료나 책값을 비롯한 용돈 등 그때그때 필요한 돈은 포스트잇에 메모해서 냉장고에 붙여놓으면, 그녀는 항상 적어둔 금액보다 더 얹어서 식탁 위에 놓았다. 순영으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불가사의했다. 함께 있어서 그녀에게 좋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두 사람 사이가 좋아질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마이너스만 되는데도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처럼 떠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성불
아버지의 반지
겨울비, 담배, 섹스 그리고
첫 여자
이 비가 그치면
자살 여행
겨울 벚꽃
꽃지에 버린 사랑
애가불망

 

이영철

1984년 한국문학 데뷔
1995년 한국문예진흥원 문인창작기금
언어세계 주간 / 문학신문 편집위원
한국소설가협회 편집장
(주) 청어미디어 영화사 회장
(현) 한국문인협회 이사
(현) 한국소설가협회 이사

수상

제6회 한국문협작가상 수상
제38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저서

소설집
『성불』 『이 비가 그치면』
장편소설
『청어와 삐삐꽃』(전2권) 『비오는 날의 쇼팽』(전3권) 『더블 클릭』(전2권)
『신의 향수』 『예수』(전2권) 『마침내 나는 꿈을 꾼다』
시집
『도시로 부는 바람』 『겨울사진첩에 내리는 비』 『사랑도 그렇게』
장편동화
『서울 촌놈』 『뚱보 천사』 『보고 싶어, 토토』
『학교 폭력 혼내주자』(전2권) 『예수님 이야기』(전5권)
『이젠 울지 않을 거예요』(문예진흥원 우수추천도서)
에세이 『너만을 위한 사랑』
영화입문서
『108개의 모놀로그』 『명작 속 독백 모음집』
시나리오
<최후의 만찬><신의 향수><해바라기>
교육학습
『리더가 되기 위한 POP스피치』(전4권)
교양 『세상을 바꿀, 한국의 27가지 녹색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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